야생화 꽃 그리고....情

[스크랩] ㅈ씨의 세계

차랑재 2006. 9. 1. 06:22

 

거실 테이블 위에는 야생화 소품 몇 점이 단촐하게 놓여 있고, 창문 밖으로 보이는 야생화 정원에는 가는 비가 하루 종일 내리고 있다. 흐리고 비 오는 날엔 으레 그렇듯이 공기가 착 가라앉아 하릴없이 옛일을 돌아보게 하는데다가 실내에 은은하게 퍼지는 음악소리는 오늘따라 ㅈ씨의 마음에 실 같은 파문을 일으킨다.         

 



ㅈ씨는 앞집 너머로 이어지는 흐릿한 빈하늘을 바라본다.

 

마흔 다섯에 노루귀를 보고 느꼈던 중년의 여유로움과, 오십 중반에 들어서서 옻나무 가지 사이로 이는 바람 소리에서 느끼는 여유로움이 풀꽃들과 함께 세월을 넘나들며 내 마음 속에 머물다 사라졌다.   

이제 그만큼의 세월을 더 살고 난 후 육십 중반에 들어섰을 그날에도 내 마음 기댈 자리가 풀꽃들 속에 머물러 있을까. 작은 풀꽃들의 세계지만 그 작은 세계 속에 내가 머물 수 있는 자리가 항상 열려 있도록 매일매일 풀꽃들을 만지며 가꾸어야겠다.

 

[조덕순씨 야생화 수필집, 풀꽃 이야기,살아가는 이야기 중에서]

 

ㅈ씨의 일과는 그렇듯 풀꽃들과 함께 시작하고 함께 맺는다. 그러다 보니 풀꽃들과 함께 해온 날들의 기록은 가족들과 함께 해온 날들의 기록과 일치한다, 아니 풀꽃들에게는 보다 더 자세하고 솔직하게 일상을 털어놓는다.

 

담장 위로 올라와 하얗고 분홍빛 꽃을 피우고 있는 자두나무, 살구나무를 보면서 대문을 들어설 때에도 이미 이러한 기미를 눈치채고는 있었으나 안마당가를 빙 둘러싸고 있는 야생화 화분들을 보면서는 ㅈ씨 마음에 깊이 들어선 야생화 자리에 짐짓 놀라지 않을 수 없었다.

 



 

대문을 들어서서 왼편을 살펴보니 자두, 살구나무가 심어져 있는 화단 앞으로 야생화 화분과 민속품들,그리고 나무등걸 등이 어울려 도란도란 애기를 하고 있다가 불시 방문객들의 발자국소리에 귀를 쫑긋 세우고 있다.

ㅈ씨는 매일매일 들꽃들이 애기하는 내용을 모아서 책으로 펴냈다. 다음은 그 중의 일부이다.

언뜻 깽깽이풀이 말하는 소리가 들립니다- 어쩌면 당신네들 인간의 삶이란 것도 더 큰 어느 세계에서 보면 들꽃 그 이상도 이하도 아니니 들꽃들도 인간처럼 배려해주세요. 설앵초도 말합니다- 나는 한라산 정상 근처에서 살다가 여기로 왔는데, 거기서는 아침 햇살의 속삭임에 눈을 떴고, 여기서는 ㅈ씨 발자국 소리에 눈을 떠요. 한라산이나 대구나 내 맘 속에 중심을 갖고 살면 모두가 다 내 고향이더라구요.  

 


사정이 이러하니 안마당 잔디밭을 둘러싼 야생화 둥지들은 전체가 세계이자 우주다. 아는 분으로부터  건네받은 양지꽃을 키우면서는 봄날의 노오란 꽃에 감탄을 하다가 가을이 되어 새빨갛게 단풍 든 잎을 보고는 시간을 잊고 공간을 뛰어 넘는다. 야생화와의 대화는 이렇듯 관념적이고 철학적이다.

 

풀꽃은

 나의 현재의 세계이며

 상상의 세계이고

 꿈의 세계이며

 내일을 기약하는 변화의 세계이다.

 

[ㅈ씨의 글 중에서]

 



남편이 관리하는 난실 곁을 따라 야생화들이 즐비하다. 뻐꾹나리, 두메잔대, 물매화, 용담, 바위구절초, 바위떡풀 등 그때그때 ㅈ씨의 가슴에 무수한 감동과 많은 의미를 담고 다가왔던 풀꽃들이 하나둘씩 소리 없이 피고 지면서 봄부터 가을까지 잔잔한 파도를 가슴에 밀어다 주고는 갔다. 그럼으로써 이제 풀꽃들은 아름다움만을 주는 것이 아니라 삶의 또 다른 얘기를 가족들과 함께 느끼고 풀어가게 하는 것이다.

 



도라지꽃은 ㅈ씨에게 있어 뿌리를 먹는다든가, 꽃잎을 먹는다든가 하는 식품으로 생각할 수 없는 그 무엇이다. 일단 분에 올라 꽃으로 다가오면 이미 도라지는 그냥 아름다운 야생화였다. ㅈ씨는 또 해오라비난초 꽃의 흰색을 단순한 흰색으로 보지 않고 속을 비우고 또 비워버려 그 속에 비쳐지는 내 마음이 부끄러운 흰빛으로 읽는다. 야생화들은 물감이고 내 마음은 백지다. 내가 그들을 키우고 관리하고 손질하지만 그들은 순식간에 내 전신에 그들의 색깔을 들이붓는 것이다. 그럼으로써 오만조차도 순식간에 해파리처럼 흐물흐물해지다 이내 녹아버린다.

 



때묻지 않은 순수함이 마치 동심처럼 어리어 있는 하이얀 별 모양의 작은 산채송화와, 눈밭에서도 꽃을 피우는 노루귀와 복수초, 가슴에 묻었던 그리움 토해내어 잎을 피우고 그 마음 모아, 모아 하이얀 빛으로 꽃을 피우는 흰매발톱, 꽃망울을 터뜨리면 다른 꽃들에게서 느낄 수 없는 초가을의 향기가 나는 뻐꾹나리, 점점이 아로새긴 얼룩점이 밖으로 스미어 비치는 모습이 세월만큼의 때가 앉은 지금의 내 모습 같은 섬초롱꽃, 실낱 같은 연분홍빛 꽃 위에 맑고 싸늘한 가을하늘이 그대로 닿아 있는 것만 같은 바위떡풀, 환상적이고 아름답기 그지없는 두메잔대, 꽃이 지고 난 다음 은회색 머릿결을 휘날리며 편안한 멋스러움을 출렁이는 할미꽃, 키 큰 남천 아래 잔잔한 보랏빛 꽃을 피우는 등심붓꽃, 내 마음이 꽃에 들떠 봄을 느끼게 했던 물매화, 나뭇가지 사이로 이는 바람소리에서 여유로움을 느끼게 하는 옻나무,

 



이들은 그동안 ㅈ씨의 정신세계에 힘을 불어넣어 주었고, 지금도 무슨 말인가를 하고 싶어한다.  

출처 : 김포 들꽃풍경
글쓴이 : 들풍 원글보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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